길위에 서보다

한강따라 걷기 - 제1구간 (2007.4.27~29)

sunny 존재 자체가 복음 2007. 5. 16. 17:45
산나물님이 안내 메시지를 보내왔다. '두근두근. 드디어 오늘...' 나 역시 두근두근.
오고 가는 길의 어려움에 마음이 무거웠던 다른 답사에 비해 출발이 아주 가볍다. 
저녁형 인간인 탓도 있을 게다.
예정시간을 훨씬 넘겨 버스가 도착했지만, 기다리는 시간마저 가볍다.
 
이번 기행은 모두 9번에 걸쳐 진행될 한강 따라 걷기의 첫 번째 구간이다.
한강의 발원지인 태백 검룡소에서 정선군 임계면 낙천리까지 약 60km다.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바지런히 걸은 이틀 길이 버스로는 불과 한 시간 길이다.
산과는 달리 차로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을 굳이 걸어서 가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검룡소로 갔다. 천삼백리 한강의 발원지.
소(沼)에 아침해가 온전히 담겨있다.
인위가 가해진 듯 제단 냄새가 난다.
그래도 소박하고 제법 때 묵은 모습이 자연스럽다.
검룡소에서 솟아나온 물은 용이 하늘로 올라가려고 몸부림을 쳐서 생겼다는 선 굵은 길로 넘치고 있다.
'자기에게 넘치는 것이 아니면 남에게 주지 말라'. 그래 이 말이었구나.
검룡소를 흘러 넘치는 물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아무 미련도 남기지 않는, 대가도 바라지 않는... 
 
검룡소로 이어진 산길을 벗어나자마자 바로 아스팔트 길이다.
당황스러웠다. 최소한 이번 구간은 도로가 아닐 줄 알았다.
신정일 선생님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길은 원래 강을 따라 났었단다.
그 길에 차도를 냈기 때문에 한강 걷는 길의 대부분은 아스팔트 길이란다. '오 마이 갓'.
우리나라 도로포장율이 세계 최고라더니...
아스팔트 걷어내기 운동을 벌여야 되지 않을까 싶다.
 
산간 오지일 거라는 나의 지레짐작과는 달리 산간 냄새도, 오지 냄새도 그다지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사람도.
가끔씩 사람이 살지 않은지 아주 오래되었음직한 집들이 나타난다.
인가도, 사람도 보이지 않지만, 도로 옆 자투리 비탈길은 은 농사지을 채비들을
이미 갖춰놓고 있다. 고랭지 채소를 재배한다고 한다.
뭔가를 뿌리기에 벌써 파종을 하나 싶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비료를 뿌리고 있다.
비료로 땅의 힘을 북돋아주나 보다. 
 
한미FTA로 시끌했던 탓에 농사짓는 모습이 나타날 때마다 눈길이 간다.
땅갈이는 기계를 이용하지만, 나머지는 다 사람 손으로 하고 있다.
농지 단위가 워낙 적어 기계를 이용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밭농사다.
생산성이란 면에서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어쨌거나 채소류는 유통문제 때문에 쌀과는 달리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니 그나마 좀 위로가 된다.
 
걸음이 더해질수록 농경지의 비탈은 완만해지고 넓이는 커진다.
집도, 사람도 많아진다. 슈퍼도... 첫 날은 수퍼마켓을 딱 두 군데 봤다.
(이쯤해서 특급정보를 하나^^, 특히 여자들에게 유용한. 한강 길을 걸을 때에는
수퍼마켓마다 공중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으니 그 곳을 이용할 것!)
둘째 날은 대여섯 곳쯤. 취급하는 물건의 가짓수도 점점 더해간다.
구간별로 슈퍼마켓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면 아주 재미있을 것 같다.
한강걷기 여정에서 수퍼마켓은 도착점이자 출발점이다.
첫째 날의 목적지인 하장에서도,
둘째 날의 목적지인 낙천리에서도 최종 쉼터는 수퍼마켓이었다.
 
수퍼마켓과 함께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건 집이다.
숫자의 많고 적음이야 당연한 거지만, 거리상의 차이에 비해 간극이 너무 컸다.
이 곳만 해도 먹고 살만한가 봐요.. 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아마 작년 수해로 집을 새로 지어서 그럴 거라는 답이 온다.
수해 범위가 엄청 넓고 그 정도도 엄청 컸었나 보다. 가도 가도 새집이다. 
 
집과 관련한 이야기 하나 더. 생뚱맞은 지붕이 가끔 보였다.
어울리지 않는 기와 지붕, 어울리지 않는 통나무 지붕 식으로...
뭐야, 하며 자세히 들여다보니 슬레이트에 모양을 그려넣은 것이다.
그냥 슬레이트면 슬레이트처럼 보이게 할 것이지, 저게 뭐야.. 짜증이 팍 났다.
왜 사람들은 굳이 가짜임을 자초할까? 그냉 냅두면 진짜인 것을...
진짜가 아닌 가짜의 초라함이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일까?
 
도로를 걷는 것은 산길을 걷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든 것 같다.
일단, 산은 걷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 마음의 포기가 쉽고,
육체적으로도 도로를 걷는 것에 비해 근육을 고루 사용하기 때문에
근육의 피로도가 훨씬 덜한 것 같다. 반면 하중부담이 없는 것은 장점이 될 것 같다.
첫날 오전에 배낭을 매고 걸으니 힘에 부쳐 오후부터는 버스에 맡겨놓고 맨몸으로 움직였다.
물도 싫다, 메모도 싫다, 사진도 싫다, 오직 이 한 몸만...^^.
(게다가 후기 끄적이는 시간도 근 한달이 경과한지라 가물가물한 부분은 도반님들의 사진,
 글 보며 기억을 되살리고 있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시점의 차이다.
산 걷기는 높은 곳에서 멀리, 강 걷기는 낮은 곳에서 가까이 보게 된다.
와닿는 느낌으로 비교하자면 신영복님이 이야기한 두 개의 먼 여행에 비유될 것 같다.
산 걷기는 from head to heart, 강 걷기는 from heart to foot.
산을 걸으며는 저 멀리 눈아래로 보이는 모든 것들을 적당히 거리를 둔 채, 그렇지만 넉넉하게 가슴에 품게 되는 반면 강을 걸으며는 개별적인 실체로 보이고 느껴짐에 따라 더 크게, 더 무겁게 다가온다.
관(觀)과 행(行) 차이랄까...
 
첫날 걷기를 끝내고 중봉천에 발을 담갔다.
강물이 감싸고 있는 산에 만발한 봄꽃에 불구하고 물은 차디차기만 하다.
보는 것과 행하는 것의 차이...
누가 본 것만으로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이가 들수록 아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적어진다.
아니 아예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지고 있다. 이제는 안다는 게 뭔지도 모르겠다.
 
어느 마라톤 선수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출발 전 신발 안에 작은 모래알갱이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무시할 수 있었던 그 작은 모래알갱이가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태산 같은 존재가 되어 온 존재를 삼켜버리더란다.
이런저런 신발속 아픔들이 은근히 신경 쓰이기 시작하더니 점점 나를 압도한다.
나중에는 발 아픈 생각밖에 안난다.
여유있게 걸어 보리라... 다짐하지 않았냐고 아무리 되뇌어도 아픔은 존재를 압도했다.
집에 와서 보니 심하긴 했다. 제일 신경 쓰이던 새끼발가락은 발톱이 시꺼멓게 죽었고,
물집도 두 군데나 잡혔다. 그것도 엄청 크게.
 
목적지 낙천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계속 이정표에 눈이 간다.
도로 걷기의 또 다른 어려움이다.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정표.
어느만큼 왔고, 어느만큼 가야하는지를 알려주지 않냐고? 몸이 힘들지 않을 때는 그렇다.
몸이 지치기 시작하자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저만치 앞서간다.
현재를 사는 것의 어려움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힘들고 어려운 때, 현재를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
미래를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는 쉽게 단언할 수 없으리라.
사람들은 끊임없이 희망을 말한다. 그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의 더 깊은 절망에는 눈을 감는다.
올둥말둥 싶은 미래에 집중하느라 지금, 여기에서의 삶은 놓쳐버린다.
18km, 16km 12km... 떨어져있는 낙천리가 아닌 지금 여기 낙천리 가는 길에 온전히 집중한다.
아니, 하려고 한다.
다시 나타난 이정표. 낙천리 10km. 마음은 다시 낙천리로, 2시간여 후로 달려가 버린다.
지금, 여기를 사는 것은 역시 도 닦는 일이다.
 
버스로 한 시간 길. 걸어서 이틀 길. 검룡소에서 임계면 낙천리까지의 여정은 이렇게 끝났다.
 
다시 신영복님의 글(최근에 읽었기에...).
 
최고의 선은 물과 같습니다.
첫째, 만물을 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자신을 두기 때문입니다.
셋째, 다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이 가로 막으면 돌아갑니다.분지를 만나면 그 빈 곳을 가득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마음을 비우고 때가 무르익어야 움직입니다.결코 무리하게 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허물이 없습니다.
 
이번 한강기행이 끝날 때쯤에는 나도 선(善)을 운운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선(善)은 나의 이름자이기도 하다.
 
(검룡소의 넘치는 물은 용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몸부림친 자국이 아직도 선연한 이 곳부터
 김포까지 이어진다... 도반인 조은뿌리님의 사진을 무단전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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