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6코스를 가다 (2008.5.31)
제주올레 6코스는 화순마을에서 시작, 송악산에서 끝납니다. 거의 비치길입니다. 제주올레의 이정표는 파란 人― 표시와 파란 리본입니다. 파란색은 제주의 푸른 바다를 뜻한다고 하네요. 제주 올레가 상징으로 내걸은 그 파란 바다를 실컷 볼 수 있는 코스입니다.
6코스 초입에 화순리 선주협회에서 원래 크기대로 복원해 놓은 테우(뗏목)가 놓여 있습니다. 거센 태풍과 맞서기에는 많이 미흡해 보입니다. 이 테우에 얽혀있을 이런저런 사연들을 상상해 보니 눈시울이 시큰해집니다만, 지금 화순리에 있는 이 테우, 생업과 연계되지 않은, 는 낭만적이기만 합니다. 뒤에 보이는 건물은 화순리 선주협회입니다. 올레꾼들에게 커피도, 화장실도 제공합니다.
코스가 동에서 서로 연결된지라 왼쪽으로 바다를 끼고 걷습니다. 6코스는 '간세다리'(게으름뱅이)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합니다. 무망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아도, 맨발로 모래사장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해도, 천연동굴속에서 낮잠을 자도, 제주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썬탠을 해도 됩니다. 일명 올레비치에서 해수욕을 해도 되구요.
어느 순간 뒤돌아 본 모습입니다. 초여름의 싱싱함, 파릇파릇함이 걷는 이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갑자기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고 싶어지니다. 이 곳을 걸어본 사람과 걸어보지 않은 사람으로요. 나남없이 많은 것을 갖고자 노력하는 세태입니다만, 사람이 정말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 곳이 바로 올레비치입니다. 아늑하죠? 인근에는 용천수(땅에서 솟아오르는 물)도 있습니다. 해수욕 후 용천수로 샤워까지... 꿈의 낙원입니다. 물론 화장실도 있습니다. 온 천지에요^*~~.
모래사장에 접어 듭니다. 모래사장이 검은 탓에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하얀모래가 일종의 피안이라면 흙빛모래는 차안이 아닐까 합니다. 차안에 사는 우리는 피안을 꿈꿀 수밖에 없긴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발 디디고 살아야 할 곳은 차안이겠죠. Black is beautiful! 을 외쳐 봅니다. 아울러 내 삶에도 'Fighting!!'을 외쳐봅니다.
6코스에도 군데군데 숲길이 있어 잠시 햇빛을 피할 수 있게 해주네요. 숲길의 몰랑몰랑함이 가슴까지도 몰랑몰랑하게 만듭니다. 이 곳에 자주 와야 하는 이유입니다.
관목깊입니다. 올레사람들이 많이 걷는 것으로 길을 냈다는 그 길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 길이 있다, 라는 말은 진리입니다만, 그 길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시대가 바꿔 쓸모가 없어진 이런 길에 대한 새삼스런 갈증, 환호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극과 극은 통한다? 반동? 사치? 무엇이든 일상에서 이런 손쉽게 걸을 수 있는 이런 길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한 번 걷고 나니 갈증이 더 커지는 군요. 앞으로 내 사는 곳 주변의 올레를 찾아 헤매게 될 것 같습니다.
이 울타리의 용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때로는 거부의 표시인 울타리도 훌쩍 넘어야 합니다. 물론 터부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우리들을 위한 배려로 울타리에 파란색을 잔뜩 칠해놓았습니다. 숏다리도 부담없이 넘을 수 있는 높이입니다. 이 울타리를 넘듯이 삶의 금기도 훌쩍 뛰어넘을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한적한 길을 무념무상한 상태로 걷는데, 홀연 부산스런 냄새가 납니다. 대표적 관광지의 하나인 용머리입니다. 올레길은 용머리 반대방향에서, 당근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앞에 하멜이 타고 표류해 온 범선이 놓여 있습니다. 예전에 이 배에 들어가 보고 깜짝 놀랐었답니다. 이 배를 타고 전 세계를 누볐을 터인 데, 장비들이 너무나 빈약해서요. 망원경, 지도 등등... 덜 갖추어 놓았을 수도 있지만, 범선이 인위적인 동력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니 아마 장비보다는 뱃사람의 노하우가 중요했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배를 타고 바람의 힘을 빌려 전세계를 휘젓고 다니다니... 대단하죠?
걷는 이의 포스가 장난 아닙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생각나네요.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르는 법.
연정에서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숲속에서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곱고 감미로우며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한편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마음을 산산이 흐트려 놓는다.
욕망의 대상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서로 다투는 철학적 견해를 초월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도달하여
도를 얻은 사람은
'나는 지혜를 얻었으니
이제는 남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알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내지 말고, 속이지 말며,
갈망하지 말고, 남의 덕을 가리지 말고,
혼탁과 미혹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애착에서 벗어나
무소의뿔처럼 혼자서 가라.
세상의 유희나 오락
혹은 쾌락에 젖지 말고
관심도 가지지 말라.
꾸밈 없이 진실을 말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물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번 불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마음속의 다섯 가지 덮개를 벗기고
온갖 번노를 제거하여 의지하지 않으며
애욕의 허물을 끊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최고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 정진하고
마음의 안일을 물리치고
수행에 게으르지 말며
용맹정진하여 몸의 힘과 지혜의 힘을 갖추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애착을 없애는 일에 게으르지 말며,
벙어리도 되지 말라.
학문을 닦고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를 분명히 알며 자제하고 노력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빨이 억세고 뭇짐승의 왕인 사자가
다른 짐승을 제압하듯이
궁벽한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비와 고요와 동정과 해탈과 기쁨을
적당한 때에 따라 익히고
모든 세상을 저버림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욕과 혐오와 헤맴을 버리고
속박을 끊어 목숨을 잃어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래도 때로는 여럿이 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뚫어지게 보세요. 산 아래쪽으로 굴이 몇 개 보일 겁니다. 태평양 전쟁때 일본군이 마지노선으로 잡은 곳이 제주도랍니다. 그래서 이 곳, 송악산에 굴을 파고 가미가제가 사용할 무기를 숨겨놓았다고 합니다. 들어가보지는 않았지만, 무지 넓다라는 전언입니다.
송악 오름길입니다. 이리저리 휘어져 있는 길입니다. 즐거움의 요체는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나타나는 크고 작은 변화는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 줍니다.
왔던 길을 뒤돌아 봅니다.
제일 오른쪽이 형제봉, 그 왼쪽 뒷편으로는 어제 걸었던 대평리 기정(절벽)이 한 눈에 펼쳐집니다. 그 뒷쪽은 한라산입니다. 미끈한 한라산 능선길 중간중간 오름들이 시선을 잡아 끕니다.
기정에서 해안길을 따라 어제, 오늘 이틀을 걸었습니다. 신영복님의 글이 생각납니다.
'자동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1미터의 코스모스 길은 한 개의 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이 가을을 남김없이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꽃 길이 됩니다.'
정말 그래요, 라고 신영복 선생님 글에 후렴구를 넣어 봅니다.
송악오름 정상근처입니다. 정상은 어디나 황폐하고 황량합니다. 바람이 많이 불어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탓이겠죠. 이래서 니체가 초인을 정상에 오른 자라고 표현했나 봅니다. 황폐함, 황량함 속에 나부끼는 올레 리본입니다. 황량함 탓에 오히려 넓어진 길입니다. 너무 넓어 오히려 길이 헷갈립니다. 혼자 이 곳을 오르는 누군가에게 이 리본은 얼마나 반가운 존재일까요? 니체의 초인도 그런 존재일까요...
꼭지점을 찍은 후의 느릿함이 아주 여유로워 보입니다. 올레의 정신이 간세다리라고 서명숙 대표께서 강조하더군요. 간세다리는 게으름뱅이라는 뜻의 제주도 말이랍니다. 간세다리라... 속도전을 추구해 보지 않은 사람이 이야기하는 간세다리와 속도전을 통과한 사람이 이야기하는 간세다리는 분명 그 울림이 아주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류의 역사는 속도를 매개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빠름과 느림의 변주가 반복되었다 혹은 되고 있다루요. 마냥 긴장해서 고고하는 것도 문제지만, 마냥 이완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도 정답은 아닐 겁니다. 삶에서 적절한 긴장과 이완을 가질 것. 모든 사람의 숙제입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행복했던 올레여행이 끝나가고 있네요. 마음속으로 아듀~ 아듀를 외칩니다. 두고 오기 너무 아쉬웠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