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2002년 여름, 어느 'gloomy Friday'이었던 듯
나는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항상 지울 수 없는 질문들을 가슴에 담고 사는 존재가 사람인 듯 싶다.
보편타당한 답은 아니더라도
내게만이라도 납득될 수 있는 답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최근에 만난 사람중 가장 멋있는 사람이 ‘미셀 푸코’라는 사람이야.
삶에 가장 치열했던 사람인 것 같다. 사람이란,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결국 AIDS로 죽었단다. 1984년에.
이 사람이 재미있는 건, 예를 들면 “제도가 인간을 만든다”라고 얘기해.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해. 이 사람 책(원래 푸코책이 악명이 높은 데,
용감하게 1차 자료(물론 번역서)에 도전해 봤다) 읽어 봐도 그런 식이야.
인간을 둘러싼 아주 일상적인 것들, 광기, 병원, 말, 지식, 성 같은 것들을
사람들이 어떻게 대해 왔는지, 그 변천사만 쭉 이야기해. 그것도 대개 문학작품을
인용하는 식으로. 그리곤 끝이야.
무심한 듯한, 한 발 뺀 듯한 그 태도가 인간이란 존재를 더 눈물겹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그럼 대체 인간은 뭐야? 예를 들어 제도가 인간을 만드는 거라면,
그래서 태어나기 전부터 그 존재의 존재방식이 정해져 있다면, 인간은 뭔 거지?
그 제도를 어느 만큼 내재화시켰는 지에 의해서만 그 사람이 얼만큼 행복한 지가
결정된다는 얘긴데, 그 제도란 게 결국 사람이 만든 거쟎아. 그것도 힘센 사람이.
그럼 힘없는 난 뭐야. 너무 허무하쟎아.
한번 더 머리 굴려본다.
아마 푸코가 주장하고 싶었던 건, 그래서 자기 삶으로 보여준 건, 인간을 옭죄고
있는 그 담론들의 실상이 이러하니, 그 담론들에 아무 생각 없이 휩싸이지 말라는
것이리라. 때로는 온 몸으로 반항도 하라는 것이리라. 너무 어렵다. 그냥 그 담론들
내재화시켜서 맘 편하게 살아야 겠다.
현애철수. 몇 번 이야기했던 단어지. 천길 낭떠러지에서 잡은 손 놓을 것.
이 단어 처음 대할 때 떠오른 느낌이 ‘구차하지 말 것’이었거든.
요즘 내 상황이 구차한 듯한 느낌이어서 더 가슴에 와 닿았던 것 같다.
구차하지 않게 사는 소망만도 버거우니, 원. 가끔 거울 들여다 본다.
거울 속에 비친 나이면서 나 아닌 얘, 한참 바라본다. 나르시스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 보다. 그 한심함에 거울 깨뜨리지 않을까 싶다. 거울 깨뜨릴
수 있는 행동이라도 할 수 있으면 덜 한심할 것 같기도 하다.
몇 일전 심연 속으로 잠겨드는 느낌 이야기한 것, 기억나니?
그냥 그렇게 물 속에 잠겨들면, 그 아득한 느낌에 몸 맡겨 버리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