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할 듯해 퍼온 글들

[펌] 정희진씨 칼럼

sunny 존재 자체가 복음 2006. 3. 7. 09:48

한겨레신문의 정희진씨 칼럼입니다. 어쩜 그리 날 설 수 있는지...

칼럼에 감동받아 저자의 책을 모두 샀습니다. 특히 마음에 든 책은 '페미니즘의 도전'입니다.

 

페미니즘이라기보다는 포스트모던적인 사유의 결과물이더군요.
그러고 보니 페미니즘이 다른 어느 이즘보다 포스트모던을 받아들이기가 더 쉽긴 할 듯 합니다.
포스트모던이 상대적으로 가볍다면 페미니즘이 결합된 포스트모던은 좀 무거운 느낌입니다.
그 탓에 멋있는 느낌은 포스트모던에 못미치지만 그 진지함은 온 몸의 털을 곤두서게 합니다.
(예를 들어 똑같이 다름과 차이에 대해 사유를 하더라도 포스트모던식으로 표현하면
주름(경계입니다^^)을 놀이터 삼아 유희하는 호모루덴스, -결과적으로 경계인이죠.
즐기는 경계인이긴 하지만...- 가 되지만, 페미니즘은 경계인이 되기를 단호히 거부하네요)

덕분에 나의 감수성, 정체성, 가치관, 다름과 차이, 소통 등등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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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세포의 상처와 수치심


연말에 정치적으로 인간적으로 힘든 일을 겪는 여자친구를 지켜보았다. 그의 위장은 운동을 멈춰 음식을 넘기지 못했고, 뇌 전원은 여러 날 꺼지지 않았다. 내장 깊이 골수까지 상한 그가 걱정스러웠다.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하나는,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보장된 것은 행복권이 아니라 행복 추구권인 것처럼, 그가 상처받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친구의 주된 감정은 상처인 반면, 상대방(들)이 주장하는 괴로움은 수치심이었다. 둘 다 고통스럽지만, 상처와 수치심은 다르다. 상처는 자신과 만남에서 발생하지만,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서 비롯된다. 상처는 사유의 열매지만, 수치심은 명예 의식과 관련하여 발달된 감정이다.

이제 황우석의 ㅎ자만 나와도 멀미를 일으킨다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이 사건에서 우리 사회가 배워야 할 것이 충분히 가시화, 언어화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성수대교 붕괴, 대통령 탄핵보다 충격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내 생각에 ‘황우석’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 가는 사건이다. 한국은 여전히 시민사회가 튼실하지 못하고, 중심 지향성이 진공청소기처럼 작동하는 권위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웬만한 사건들은 곧바로 국가 프로젝트가 된다. 그래서 문제가 터졌다 하면 모든 사회적 모순이 일거에 폭발한다. 이 사태도 과학 기술과 정치, 윤리, 여성인권, 난치병 환자의 고통, 지구화, 자본, 애국주의, 언론, 정권안보, 학벌주의, 군사주의 등이 난마처럼 얽혀 있어, 완전한 진상 규명은 불가능할 듯싶다.


나는 이 실마리 없는 복잡한 실타래에 대해, ‘논문’의 ‘공저자’인 당사자를 포함해, 우리 사회가 자랑 아니면 수치스러워 할 뿐, 상처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장 놀랍다. 몇년 전 전두환씨의 골목 성명을 연상케 하는 황씨의 기자회견은 그 절정이었다. 이런 일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닐 텐데, 대학의 연구 풍토와 정상화된 ‘커닝 문화’, ‘국익’이라는 이름의 파시즘에 대한 반성과 고백이 거의 제기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당사자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겉치레 반성조차 없다(하긴, 누가 ‘당사자’인지도 모르겠지만).


자신과 마주하는 고백을 통해야만, 자기 행위를 ‘죄’로 경험할 수 있다.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이 성숙이다. 고백하기 전까지는 자기 잘못을 무의식에 저장할 수 있지만, 고백하면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수치심이 상처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때서야 죄책감은 체면이나 합리화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의 거울이 될 수 있다.


사회, 타인과 같은 외부와 닿았을 때 가장 아픈 곳, 그곳이 가장 정확한 나다. 성공 신화가 초래한 자기도취 앞에서는 자아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 타인이 보는 나는 내가 아니라, 타인의 열망, 외로움, 공포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황우석’은 ‘강한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차라리 망상의 공동체라 부르고 싶다)가 만들어낸 욕망이다. ‘진실’은 가슴과 몸과 마음을 가장 난폭하게 훼손해야만, 우리 내부로 젖어드는 것. 상처받지 않고는 진실을 알 수 없다. ‘국민’ 모두가 자신에 대한 의문을 포기하지 않는 ‘상처받은 치유자’가 되지 않는 한, ‘황우석 사태’는 역사가 아니라 에피소드에 그칠 것이다.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면서, “그래도 브릭이 있었다”, “한국의 생명공학은 이미 세계 정상급이다”, “피디수첩이 대한민국의 명예를 살렸다”는 식의 위안은 희망이 아니라 국가주의라는, 이 사태를 일으킨 문제의 원인이다.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

 

 

변태의 어려움


혁명보다 어려운 것이 개혁이다. 혁명은 이름과 의식을 바꾸는 것이지만, 개혁은 몸의 형태를 바꾸는 것, 즉 변태(變態)의 과정이다. 개혁(改革)은 글자 그대로 살갗을 벗기는 것. 피가 쏟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시대나 개혁을 주장하는 지도층은 스스로 피 흘리는 고통을 보여줄 때만이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는 테제로 유명한 맥루언의 걸작 〈미디어의 이해〉의 부제는 ‘인간의 확장’이다. 오늘날 인터넷, 휴대 전화가 우리 몸의 일부이듯, 이 책은 몸이 인식의 매개체(미디어)라고 주장한다. 앎이란,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에게로 몸을 확장하는 것. 인식과 발상의 전환을 경험하게 되면, 다시는 알기 이전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안다는 것은 확장된 자기 몸에 사로잡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변화는 새로운 인식을 의미하는데, 이는 ‘머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발생한다. 알이 부화하여 나비가 되듯, 몸이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하는 변태의 고통을 뜻한다. ‘변태’가 원래 의미보다는 흔히 ‘변태 성욕’의 줄임말로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기존 질서를 수호하고자 하는 사회는 변태하는 사람을 싫어할 것이다.


사랑과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인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자기 부정이다. 사랑과 운동은 목적에 헌신하기 위해, 그들 몸의 일부가 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역량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이나 사유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사랑이 깊을수록 대상과의 관계로부터 자신을 철회하기도 한다. 금연, 다이어트, 일찍 일어나기, 관계·초콜릿·카페인·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기 등 사람들의 계획이 대개 실패하는 것처럼, 자기 변태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변태는 기존의 나를 상실한다는 점에서 위협적이며, 미래의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없어 두렵다. 특히, 연령주의 사회에서는 나이가 들면, 오후 3시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오후 3시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고, 포기하기엔 미련이 남는 위치다. 자기 문제를 극복할 수도 승복할 수도 없고, 자기 조건에서 탈출하기도 저항하기도 힘들다. 막다른 골목을 꺾어진 골목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인간은 그리 많지 않다.


변태는 자신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존재가 인간이다. 우울증으로 고통 받던 미국의 어느 소설가는 자살을 결심한다. 상처받을 주변 사람들을 걱정하여, 남들도 납득할 만한 자살 이유를 찾다가 에이즈에 걸리기로 마음먹는다. 6개월 동안 온갖 위험한 섹스를 시도하다가, 어느 날 타인에게 에이즈를 전염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두고 검사를 의뢰한다. 결과를 기다리며 그는 에이즈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것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비참하다.


너무 심란한 이야기인가? 모든 사람이 “나를 바꾸고 이전과 같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책을 쓴다”는 푸코처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실은, 변태 과정에서의 좌절과 자기혐오가 변화 없는 현실의 괴로움보다 더 고통스러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그냥 생긴 대로 살까? 나를 다른 세계로 날아가지 못하게 하는 현실의 중력을 인정하며, 어차피 가끔 중독은 필요한 것이라 자위하며, 결핍은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든다고 믿으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나을까?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

‘불혹’이 아니라 ‘유혹’


종교는 우리에게 죽음 뒤에 삶이 있다고 말하지만, 사랑은 죽음 전에 삶이 있다고 말한다. 노동처럼 사랑(보살핌, 대화, 정치적 연대 등을 타인과 공유하는 활동)과 섹스는, 생존의 조건이자 인간의 존재 형식이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 것과 같다. 〈마더〉라는 영화에서 70대 여성이 30대 남성과 사랑을 나눈다. 게다가 그는 딸의 애인. 고통 받는 그 여자는 “난 아직 죽을 준비가 안 되었나 봐”라고 흐느낀다. 죽을 준비 중의 하나는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시한부 환자나 노인에 대한 사회적 투자는 회수하기 힘들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효율성을 둘러싼 회의와 논란에 부닥친다. 이들을 위해 자원을 사용하는 것을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누구나 죽기 전까지는 죽은 것이 아니다. 삶은 죽음에 다가가는 과정. 이 말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시간의 가치는 평등하다는 의미다. 젊음은 ‘좋은 시절’이고, 중년은 ‘해질녘’인가? 나이를 계절이나 하루 일과에 비유하는 것은, 위계적이며 따라서 정치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일흔살은 성인의 경지에 이른다는 ‘종심’(從心所欲 不踰矩)인가? 그렇다면 성인은커녕 불법적인 사랑의 욕망에 괴로워하는 영화의 주인공은 한심함을 넘어 노추(醜)일까? 열다섯 지학, 서른 이립, 마흔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공자의 연령주의는, 어떤 면에서 서구 근대성의 핵심 논리인 생애주기와 닮아 있다(정확히 말하면, 생애주기가 연령주의의 일부지만). 특정한 나이에 맞는 사회적 역할과 규범을 정의하는 생애주기는, 젊은 비장애인 남성, 즉, 가장 ‘생산력 있는’ 인간을 노동자 모델로 확보하기 위한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중세에는 아동기라는 말 자체가 없었고, 성차별과 함께 연령차별이 근대 국민국가의 주요 조직 원리가 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사십 이후에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식의 언설은 문제다. 자기 성찰에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젊은이’도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죽음 직전까지 불안정하게 흔들리면서, 혼돈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깨어 있는 인간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옥죄고 있는 권위주의, 계급과 교육 문제, 획일주의의 상당 부분은 나이에 적합한 정상성을 요구하는 생애주기 문화 때문이다. 나이 듦이 인생 포기가 아니라면, 왜 황혼 이혼이 뉴스거리이며 예순 넘어 대학에 들어가고 오십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안 되는가?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누구나 언제든지 모든 분야의 초보자가 될 수 있는 사회가 가장 민주적인 사회가 아닐까.


욕망은 결핍에 대한 것. 결핍이 충족되면 욕망도 사라진다. 그래서 ‘불혹의 마흔살’은 어불성설을 넘어 잔인하다. 대개 보통사람들은 나이 들수록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자원을 잃게 된다. 때문에 ‘늙을수록’ 결핍에 괴로우며, 그만큼 욕망은 커질 수밖에 없다. ‘사십 불혹설’을 퍼뜨리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 성별과 계급 자원으로 나이를 극복할 수 있어서 결핍의 고통을 덜 받는 ‘가진 자’거나, 자기 꿈을 좇기가 두려우니까 남의 꿈도 비웃는 비겁을 ‘집착 초월’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안전은 미신이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유혹당하면서, 자신을 가능성에 개방시키고,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하는, 도전에 매료되는 삶은 개인의 성장일 뿐 아니라 모두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다.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