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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다시 본 무소의 뿔처럼

sunny 존재 자체가 복음 2004. 9. 6. 14:55
 

작가 공지영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 절대로, 어차피, 그래도를 즐겨 사용하는 세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절대로’를 즐겨 사용하는 혜완은 자존심이 세고 모욕을 참지 못하는 강한 성격으로 전통적인 여인상을 강요하고 구타, 성폭력을 행사하는 남편과 과감하게 이혼하고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어차피’를 즐겨 사용하는 경혜는 과시욕이 강하고 현실적인 성격으로 의사인 남편 덕에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리나 계속되는 남편의 바람기로 마음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래도’를 즐겨 사용하는 영선은 헌신적이고 조용한 성격으로 남편을 내조하느라 무능력해져 버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 자살을 하고 만다.


공지영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 똑똑하고 자존심 센 소설가 혜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엘리트주의를 지양하고, 혜완의 시각으로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넘나들면서 그네들이 서로 다르게 사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풀어 나간다. 그네들이 선택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여자라면 -특히 결혼한- 누구나 한번쯤은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혜완에게도, 경혜에게도, 영선에게도 똑같은 심정적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다른 페미니즘 소설에 비해 여성간 연대나 해법을 강조하는 게 상대적으로 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 주장하는 바를 알아채기가 어렵지는 않다. 먼저 연대를 보자. 서로 다른 세 여자가, 그 다름만큼이나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서로에게 들춰내 보여 주고, 서로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받아 들여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부러움으로, 연민으로 받아들이며, 태어났을 때 잔칫상 얻어먹지 못한 젠더의 공통성-특히 불행-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라는 정서적 연대를 추구하고 있다. 또한 작가가 주장하는 해법은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이다. ‘혼자서 가라’는 의미가 작가가 후기에서도 밝혔듯이 독신으로 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요즘 회자되는 용어로 ‘따로 또 같이’ 즉, 동지적 애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게다. 이는 혜완과 선우와의 관계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이 주장에 힘을 실어 주기 전에 작가에게 먼저 해명을 듣고 싶은 것이 있다.


공지영은 소설가 장을 통해 말한다. <“아내에 대해서는 죄책감은 있지만 전 가장 노릇을 하지 않은 적은 없어요. 아내에 대해선 친구같은 사랑이랄까. 우정 같은 것도 가지고 있고 전... 설거지도 잘해주고 직장에 다니는 아내를 위해서 밥도 합니다... 우린 뭐랄까 동지 같은 관계라고나 할까요. 형제 같은 사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소설가 장은 동지고, 형제 같은 아내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 도대체 여자가 서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 작가가 해법으로 제시한 그 동지적 애정은 열정적인 사랑 앞에서 무력하기만 한 데...



<그 세 모녀가 서 있는 것이다. 피어나는 꽃같이 화사한 영미와 그 옆에 선 무표정한 영선과, 그리고 경혜의 표현대로 삼줄 같이 뚝뚝한 표정의 어머니. 펑펑 소리를 내며 사진사가 스트로브를 터뜨렸다. 섬광처럼 하얀빛이 거기 늘어선 서로서로 닮은 얼굴의 사람들을 비추었다.>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인생을 자기 의지대로 살 수 있다고 믿는 환상적인 낭만주의자가 틀림없을 거다. 서로서로 닮은 얼굴의 사람들. 그 닮은 얼굴 중 한 얼굴은 화사하고, 한 얼굴은 무표정하고, 한 얼굴은 뚝뚝하다. 그 얼굴의 표정들은 살아온 삶의 무게이다. 세월이 갈수록 무거워만 가는 그 삶의 무게에 짓눌려 화사한 얼굴이 무표정하게, 뚝뚝하게 변해 가는 데... 뚝뚝하게 변해 버린 얼굴을 보며, 그 사람이 감당해 온 삶의 무게를 인정하고, 그 무게 감당한 그 얼굴에 존경을 표해야 하지 않을까? 화사하고 무표정한 얼굴과 뚝뚝한 얼굴의 화해는 언제쯤 이루어 질까?


이 소설에서 가장 안타까운 건 영선이 결국 자살한 것이다. 영선에게 그렇게 희망이 없었을까? 영선은 자살 기도의 이유를 설명한다. <“... 나는 칼을 들었지. 아까 이야기하던 대로 그를 알코올 중독에 우울증이 있는 미친 부인의 희생자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 죽을 사람은 나였던 거야... 내가 죽어야 그가 더 이상 착한 남자가 되지 않는 거야...”>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서 영선은 말한다. <“내가 그때 그를 죽이지 않은 건 나를 그렇게 망신을 시켜 놓고 코를 골며 자는 그를 죽이지 않은 건 결코 그를 착한 남편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이 세상 모든 인간들 중에 내가 제일 혐오스러웠기 때문이었어... 내 스스로가 벌레 같았기 때문에 죽여 버리고 싶었어... 세상 사람들이 더 이상 내가 벌레라는 걸 알아차리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없애 버리고 싶었던 거야...”> 영선은 재주 많았고, 공부 잘했던 자기가 무능력하게 변해 버린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편을 원망하며 술로 도피한다. 그 내면에는 남편이 나의 도움으로 출세했으니 그 정도는 받아 주어야 한다는 보상 심리가 내재해 있었을 것이다. 그 심리가 영선이 처음에 설명한 자살 기도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영선은 반성한다. ‘그래도’. 그리고 인정한다. 어쨌든 문제의 원인은 자기라는 것을. 우리는 늘 말하지 않는가? 문제가 어디에 있는 줄 알면 그 문제의 반은 해결된 것이라고. 그러나 영선은 문제의 원인을 찾아냈지만,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아마 작가가 보기에 영선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체념’하는 것 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고 여긴 듯 하다-사실 가장 현실적이긴 하다-. 그게 너무 안타까웠을까? 재능 많은 영선이가 체념한 채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는 것보다는 죽어서 49일 안에 다른 몸으로 태어나기를, 그래서 새 세상에서는 그 재능을 맘껏 펴 나가기를 원했나 보다.



작가는 우울한 이야기 전개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해 아주 낙관적인 듯 하다. 혜완의 전남편 경환은 새로 시작한 결혼 생활에서 과거를 반성하고 아주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 준다. 희망찬 미래를 위해 지금 깨어 있는 여성의 분발을 촉구하고 있는 듯 하다. 그 혜택이 결국 다른 여성에게 돌아가더라도 말이다. 또 하나의 낙관적인 코드는 ‘열쇠’이다. 소설 서두와 중간에서 혜완은 고장난 열쇠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쇠를 바꾸지 못하다가 영선이 떠난 후, 아니, 선우와의 관계가 재정립된 후에 드디어 고장난 열쇠를 바꾼다. <이제는 의자의 다리를 고치는 데 아무 쓸모가 없는 찐득찐득한 녹색 테이프를 풀어버리고 혜완은 의자를 일으켜 세웠다. 네 개의 다리 중 세 개는 멀쩡했지만 부러진 한 개의 다리 때문에 의자는 세워지지 않았다. 혜완은 그것을 벽에 가지고 가서 기대보았다. 그러자 의자는 꼿꼿이 제 모양을 유지했다.> 영선이 술 취해서 부러뜨린 의자는 4개의 다리중 하나만 부러졌을 뿐인데도 세워지지 않는다. 그 다리는 테이프로 봉합해 보았지만, 오래 버텨 주지 못했다. 벽에 기대어 둔 것 또한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혜완이 고장난 열쇠를 바꾼 것은 부러진 다리에 못질을 한 의미일 것이다. 혜완에게도 이제 힘들었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힘들 터이지만, 튼튼한 의자에 앉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올 것으로 기대하면서 독자들은 이 책을 덮을 거다.



거의 10년만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다시 읽었다. 처음 읽을 당시의 리얼리티가 많이 사라져 있었다. 이것은 분명 TEXT 자체의 변화는 아닐 터..., 기뻤다. 한 10년쯤 후에 이 TEXT를 다시 접할 때, ‘아니, 이런 원시시대가 있었다니...’ 하기를 바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