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에게 神이 된 것, 통계
1. 들어가는 말
포스트 모더니티의 시대다. 절대 진리가 무너지고 다양한 가치가 추구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모습은 다양한 개성으로 흘러 넘쳐야만 할 것 같은 데, 삶의 모습은 오히려 더 표준적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아직은 모더니티와 포스트 모더니티가 공존하는 사회여서 일까? 대중매체를 통한 이미지 조작의 시대여서 일까? 아니면, 개인보다 집단을 앞세워 온 우리의 전통 탓일까? 지금 이 시대에 우리의 삶을 표준적으로 만드는 규범 혹은 준거로 기능하는 것이 있을 법하다.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곳곳을 여행할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어느 두메산골에도 어김없이 솟아올라 있는 십자가이다. 외형상 우리나라는 종교 국가이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천도교, 원불교, 대순진리교 등등 종류도 무지(매우) 많을 뿐더러 우리나라의 각 종교별 신앙인구를 다합치면 전체 인구보다도 많다고 하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린다. 종교는 인류의 역사 이래로 사람들의 삶의 준거로 기능해 왔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삶의 준거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은 종교일까?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대상으로 사회적 태도를 조사한 통계자료를 접한 적이 있다. 그것에 의하면 두 집단간 준법성, 도덕성 등의 각 부문별 태도는 거의 차이가 없으며, 배타성 항목에서만 종교인이 비종교인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외형과는 달리 우리의 실제 생활은 종교의 지배를 그다지 받고 있지 않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ㅇ 이 단락은 전체 논지와 관련이 없으니 생략하는 것이 좋을 듯.
이 단락 자리엔 전체주의 문화 풍토, 언론의 대중 조작, 개인주의의 미 활성화, 자본주의 소비문화 등 표준화된 삶을 강요하는 것들 가운데 통계 이외의 것들을 나열하면서 이런 것들도 우리의 생각과 삶을 표준화하지만 통계도 한 몫을 한다라는 식으로 전개해야 합니다)
신문을 펼쳐 보자. 정치면, 경제면, 사회면, 문화면, 스포츠면, 심지어 광고까지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갖가지 통계이다. 인터넷 사이트에 한 번 들어가 보자. 거기서도 예외 없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크고 작은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의견을 물어 보는 설문들이다. 사람들은 나의 삶이 어디쯤에 있는지를 점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남과 비교한다. 평균적이고 표준적인 ‘남’을 파악하기 위해 ‘내’가 이용하는 것, 그것은 통계가 아닐까? 온갖 매체마다 범람하는, 그래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접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통계들은 내가 표준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확인할 수 있는 지표로서 기능을 한다.(‘기능’엔 ‘하다’라는 접미사가 바로 붙을 수 없음) 통계로 비교해 본 나의 모습이 표준인 경우에는 심정적인 안도와 확신을 갖게 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좌절감과 불안감을 갖게 되고, 표준에 들어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된다. 이제 통계는 현대인의 생활에서 의식적, 무의식적인 삶의 준거로서 기능하고 있다고 보아진다.
인류의 역사에서 오랜 기간동안 삶의 준거로서 기능해 온 것은 종교이다. 삶의 준거로서 종교는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담당했던 걸까?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현대인의 삶의 준거가 된 통계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 우리 삶의 준거가 종교에서 통계로 바뀌었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바람직한 것인가? 바람직하지 않다면 어떤 문제가 있으며,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주제, 메시지의 일관성이 없으므로 종교 이야기는 생략하고 통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음)
2.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는 무엇을 했나?
‘종교’는 사전적으로는 무한(無限)․절대(絶對)의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하고 신앙하여 선악을 권계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로 정의된다. 인간의 정신문화 양식의 하나로 인간의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에 관하여 경험을 초월한 존재나 원리와 연결 지어 의미를 부여하고 또 그 힘을 빌려 통상의 방법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인간의 불안․죽음의 문제, 심각한 고민 등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종교는 인류의 시작부터 인간과 그 궤를 같이 하며 각 역사의 발전 단계마다 질적 변천을 거듭해 왔다. 예전과는 비교할 바가 못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의 내적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는 어떤 역할을 수행해 왔을까?
2-1. 원시사회
원시사회에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자연과 무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였다. 이 상황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이란 있을 수 없었다. 무리에서의 자기의 기능이 곧 인간 존재의 의미였다. 점차 무리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공동체는 구성원들에게 더욱더 세분화된 기능과 역할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사회 구성원들은 고도의 신체적인 숙련과 보다 고차원적인 지적 능력을 발달시켜야 했으며, 그 결과로 인간은 여전히 무리의 구성원으로서 자기의 존재와 한편으로는 자기만이 수행할 수 있는 개인의 독특한 기능을 구별하게 된다. 즉, 구성원간의 차별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구성원들간의 차별성은 기능과 역할의 차이에 따른 호칭의 구별, 각종 몸치장과 독특한 행동 등으로 표현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차별성이 집단적으로 표현되면서 다른 공동체와의 차별성이 드러나게 된다.
타인과의 차별성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개인들은 자신의 차별성을 내적으로 좀더 심화시켜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 되게 한다. 무리의 경우, 자신들만의 수호신 혹은 조상신과 같은 독특한 정신 세계를 만들어 자연과 사회 그리고 개인에 대한 이념의 차별성을 두어 다른 무리와 구별되게 하였다. 구성원들 각자의 경우, 이러한 이념과 그 이념에 따라 규정된 삶의 태도를 수용하는 동시에 그것을 적극적으로 내재화시켜 자신을 비교하고 수정해 나가면서 공동체 내의 존재로서 자신을 규정하게 된다. 한마디로 원시사회에서 종교는 신화와 제의를 통해 공동체에서 일탈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 구성원들에게 기존의 이념과 그에 대한 믿음을 지속적으로 지도하고 유지토록 하는 기능을 했다.
2-2. 고대사회
개인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무력과 강력한 법에 기초한 로마제국이 성립되면서, 사회는 강력한 법과 무력에 의해서 유지되는 거대한 공룡이 되었다. 현실은 더 이상 개인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은 현실을 외면하고 내면의 세계에 몰입하게 된다. 고대사회의 생산력은 노예 노동에 의해서 유지되었는데, 이 노예야말로 사회의 폭력과 통제 하에 신음하는 개인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예 상태의 상황을 견디기 위하여 인간은 내면에 호소하는 크리스트교에 귀의하게 된다. 크리스트교는 육체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인간들에게 이 고통스런 상황을 끝나게 해 줄 구세주 메시아의 존재와 육신의 죽음 이후에 영혼의 해방과 구원,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즉 크리스트교 교회는 ‘가이사르의 것은 가이사르에게, 주님의 것은 주님에게’라는 가르침으로 노예 노동에 기초한 로마사회가 유지될 수 있도록 기능하였다.
2-3. 중세사회
로마의 중앙정부는 게르만족들의 침입에 의해서 그 실체를 상실한다. 토지를 매개로 한 고대 도시 문화 로마와는 달리 게르만족의 문화는 반유목, 반농경의 원시 공동체 문화였다. 이 두 문화가 융합하여 봉건제가 등장한다. 봉건제 사회는 농지를 중심으로 한 촌락 공동체와 같은 것이었는데, 이 봉건사회를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교회가 담당하였다. 교회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이 세계에서는 자연적인 것으로 인정하도록 구성원들을 교화하였다. 교회는 사회가 통치하는 자, 기도하는 자, 노동하는 자로 구분되어 있으며 각기 침범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인간은 종말을 맞이할 이 세계 속에 놓여 있는 죄인이며, 교회의 지도를 받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는 타율적인 존재이며, 교회가 인정한 기존의 질서를 그리고 교회가 부여한 자신의 지위를 운명으로 순응해야 하는 존재라고 가르쳤다. 교회는 이렇듯 각종 질서와 윤리 지침을 제공함으로써 봉건제 사회의 안정을 꾀하였다.
이슬람의 지중해 봉쇄가 해소되고 십자군 전쟁을 통해 동방과 재교류를 하게 되면서 봉건적 농촌 질서가 해체되고, 지주와 농노라는 신분적 지배․예속 관계는 화폐를 매개로 한 관계로 변한다. 상인들은 자유로운 교역과 생산 활동을 위해 돈을 주고 영주로부터 땅과 각종 법적 권리를 양도받아 중세도시를 세운다. 이 중세도시에도 예외 없이 교회가 있었지만, 그 교회는 기존 사회 이념을 고수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이에 금욕과 노동을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이 일어난다.
2-4. 근세사회
근세 시대에 자연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인간 능력에 대한 재발견과 신뢰 그리고 이에 의거한 인문주의 사상을 정착시키게 된다. 이제 개인은 누구나 평등하고 보편적인 이성을 지닌 존재로 규정되어 인간의 본성을 타락한 것으로 본 교회의 권위는 무너지게 된다. 이제 인간은 그동안 자신을 규정해 왔던 외부의 권위로부터 자율을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이전에 없었던 강력한 감시자를 갖게 된다.
또한 자연과학의 발전이 생산력의 발전으로 이어짐에 따라 인간은 거대한 자본의 틀 안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자가 된다. 인간의 생활과 소비는 생산력을 계속해서 확대시키고 이는 식민지 쟁탈전을 야기하여 세계는 두 차례의 커다란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 전쟁의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이 이룩한 기술로 대량 살상이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세계는 점차 피폐되어 지구 전체의 생태계를 위협하는 한계에까지 이르렀고 개인은 각기 이성이라는 골방 속에 갇혀 자본주의 사회의 탐욕스러움에 순응하는 미약하고 소외된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2-5. 현대사회
자연의 황폐화는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의 안위에 심각한 위협을 주었다. 자연에 대한 이전의 기계적 혹은 물질적 이념은 이제 바뀔 수밖에 없게 된다. 자연은 이제 다시 유기체적인 존재가 된다.
사유하는 이성으로만 규정된 인간에 대한 개념도 바뀌게 된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의 독특함은 환경에 적응한 결과였음을,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은 일상적인 인간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무의식과 욕망임을 밝혀 냈다. 이제 인간은 합리적이고 의식적인 존재이지만은 아니게 되었다. 이제 이성에 기반은 두지 않은 여러 문화 현상이 주목받게 되어 상대적이고 다원주의적인 문화가 형성된다. 개인들은 세계와 사회는 물론 자신의 정체성마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이제 인간들은 무엇을 준거로 하여 살아야 할 것인가?
(종교사를 쓰는 것인가, 인류의 종교사를 이 몇 마디로 요약하는 것이 타당한가?
비평을 하는 것인데 왜 백과사전적 요약을 하는가?)
2-6. 무인도에서의 로빈슨 크루소
『로빈슨 크루소』는 1719년에 다니엘 디포우Daniel Defoe가 발표한 영국의 소설이다. 크루소란 사람이 항해하던 중 태풍에 배가 난파되어 무인도에서 홀로 28년을 보낸 후 구조되어 다시 영국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으로,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아주 사실적이고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이 작품은 섬이라는 제한된 상황 아래에 놓인 한 인간의 종교적, 내면적인 심리의 변화와 성장을 세밀하게 그려낸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크루소의 종교적 심리의 변화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자.
“이 주머니에서 영혼과 육체의 치료제를 찾은 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계시였으리라...... 그리고 거기에 있었던 몇 권의 책 중에서 먼저 내가 말한 성경을 꺼냈다. 이때까지 나는 이 성경을 들여다 볼 시간적 여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우연히 펼친 성서에서 문득 눈에 띈 구절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란 말씀이었다. 이 구절의 첫 부분은 지금의 내 경우에 아주 잘 들어맞았기 때문에 읽자마자 내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나는 ”하나님이 이곳에서 과연 나를 구원하실까?“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성경을 꾸준히 읽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림으로써, 내 영혼은 보다 높은 세계로 지향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까지 전혀 알 수 없었던 커다란 마음의 안식을 느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건강과 체력을 도로 회복하자, 나는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을 마련하는 데 노력하면서 일상 생활을 규칙있게 꾸려 나갔다...... 이 불행한 섬에 온 지도 이제 열 달이 넘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오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말할 수 없을망정, 어떤 고통스런 시련을 겪게 하여 내 눈을 뜨게 해서 과거의 생활을 반성하고, 그것의 사악함을 슬퍼하며 회개하도록 해 주신 데 대해서는 하나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올렸다. 나는 옛날 성서를 뒤적거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영국에 있는 내 친구에게 지시해서 다른 물건과 함께 성서를 보내주시고, 후에는 조난 당한 배에서 이 성경을 찾아내도록 도와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심정으로 이 섬에서 3년째를 맞았다. 첫해의 생활처럼 자세하게 이 해의 작업을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전반적으로 보아 쉴 틈이 거의 없었다는 것만 말해야겠다. 나는 매일 일과에 따라 시간표를 작성, 규칙적으로 생활했다. 그 일과의 첫째가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성경을 읽는 일이었다. 둘째는 총을 들고 사냥을 나가는 일인데, 비가 오지 않는 날은 보통 오전 중 세 시간이 걸렸다. 셋째는 잡아온 짐승을 간추리고 간수하여 요리하는 일이었다.
이 섬에 갇힌 외로운 생활 속에서도 나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나를 이곳에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손에 나아가고 싶어 내 마음은 감동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연장이 되어 불쌍한 야만인의 생명과 영혼을 구하고, 그에게 신앙과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식을 가르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한 삶을 알게 해주었다. 이런 일을 모두 돌이켜 보니, 내 영혼 구석구석에 은밀한 기쁨이 넘쳐 흘렀다. 내가 이 섬으로 오게 된 것을 전에는 내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심한 환난으로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자주 느끼는 즐거움이었다.
게다가 머지않아 확실히 구조될 수 있다는 희망까지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감사할 이유가 더욱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과 다름없이 땅을 파고 씨를 뿌리며 울타리를 치는 등 농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옛날처럼 포도를 거두어 건사하고 필요한 일을 다 했다
한번 상상해 보라. 무인도에서 홀로 28년여를 지내며 자신의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기도하고, 일하며,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사는 한 프로테스탄트의 모습을. 종교가 인간의 의식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
(2장 전체를 생략하는 것이 좋음)
3. 우리의 생활에서 ‘통계’란 무엇인가?
‘통계’의 사전적 의미는 집단현상에 대한 구체적인 양적 기술을 반영하는 숫자이다. 특히 사회집단 또는 자연집단의 상황을 숫자로 나타낸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 인구의 생계비, 한국 쌀 생산량의 추이, 추출 검사한 제품중의 불량품의 개수 등이 그것이다. 통계는 집단에 관한 것으로서, 어떤 사람의 재산이라든가 한라산의 높이 등, 어떤 개체에 관한 수적 기술은 아무리 구체적이더라도 통계는 아니다. 통계는 사회의 발전과 함께 발달해 왔는데, 오늘날의 사회생활과 과학은 통계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정도이다.
국가가 징세, 징병 등의 목적을 위해 호적이나 토지대장을 만들어 이것을 근거로 통계를 작성한 것은 그 역사가 오래된 일이다. 고대 로마에서의 인구에 대한 신고 조사는 ‘센서스’라 불렀으며, 오늘날까지 그 명칭이 전한다. 또 중국에는 전한말기(前漢末期) 이래 '호수인구수(戶數人口數)'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통일국가가 무너지고 봉건적 분권화가 진행된 중세에는 신뢰할 만한 인구통계를 거의 남기지 못했다.
근대적 통계는 19세기 초의 유럽에서 성립되었으며, 이때부터 인구통계의 정확성이 제고되었다. 19세기 중엽 무렵에는 선진국들은 통계제도를 정비하여 통계의 대상도 인구․범죄에서 폭을 넓혀 산업․무역도 포함하게 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특히 사회문제가 중요시되어 가계조사 등의 통계까지 등장하였으며, 20세기에 들어와 통계는 더욱 확충․강화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고비로 국가가 경제정책․사회보장정책 등 국민생활의 여러 부문에 걸쳐 정책적 개입을 다면화함에 따라 각종 통계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통계들은 국민경제 계산론․산업연관론 등 국민경제 전체를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확립됨으로써 통계의 체계가 특히 경제면을 중심으로 정비되어 갔다.
(통계에 대한 사전적 나열인 위 두 단락도 생략함이 좋습니다)
21세기인 지금 통계가 어느 정도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K가 있다. 출근 전, 신문을 대충 훑어본다. 1면, 모 후보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과 관련, 수사 참고용으로 작성한 리스트가 있다며, 그 리스트에 오른 유명인사들의 직업별 통계가 나와 있다(우리 사회가 그렇지 뭐). 바로 옆에는 태풍 ‘루사’ 때문에 고립된 마을들에 대한 통계가 보인다(쯧쯧...). 다음 면, “문화방송 국감포함 문제 있다”라고 생각하는 전국 언론사 편집․보도국장들의 비율이 79%라는 기사가 눈에 띈다(뻔하지, 뭐.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거 아니겠어). 최근 집값 상승과 관련 주택안정대책의 내용을 설명하며 역시 많은 통계숫자를 언급해 놓았다(이 정도로 될까?). 펀드 수익률 순위 1~5위 차지했다는 통계를 내보이는 K투신의 광고(수익률이 얼마나 되나? 있는 돈, 없는 돈 몽땅 싸들고 가 봐?). 경제면, 한국 특허 경쟁력이 ‘세계 3위’라는 기사(아니, 이 좁은 나라에서? 이제라도 변리사 자격증에 도전해 봐?), 유선통신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며 대기업들이 매물로 내놓은 통신업체 주식의 지분율을 정리해 놓은 표도 보인다(격세지감이네! 몇 년전만 해도 주가가 천정부지였는데...). 국민주택기금에서 부실건설업체에 대출보증해 주었다가 공적자금으로 대신 갚아준 비율이 73%란다(열받네, 내가 낸 세금으로 잘 해먹었구먼). 직장인 10명 가운데 7명이 올 가을에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라는 기사도 보인다(나도 버스 갈아타?). 국제면, 최근에 열렸던 지구정상회의 관련 기사중 이산화탄소 배출 현황을 정리해 놓았다(아직도 갈 길이 머네!). 9.11 테러 1주년 관련 미국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에 대한 통계기사도 있다(쟤네들에게는 큰 일이었지...). 스포츠면은 축구, 야구, 배구 등 각 종목별로 개인 및 팀에 관련된 온갖 숫자들로 덮여 있다(모릅니다, 관심없수다). 넘긴다. 수도권 소식으로 일산노인종합복지관이 아주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라는 근거로 매일 평균 3,500명이 이용하고 있다라는 근거가 제시되어 있다. 사회면으로 넘어가니 각 지역별로 비 올 확률, 예상기온 등 온갖 숫자들로 한반도가 잔뜩 덮여 있다. 바로 아래 단에는 눈병 환자가 28만여명이 발생하여 141개교가 휴교하고 있고(우리 집까지는 안 와야 할 터인데...). 수해지역에 돌림병이 만연하고 있단다. 문화마당에서는 박스 오피스 순위가 눈에 띈다(오아시스가 마이너 리포트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단다, 오아시스나 보러 갈까 생각해 본다). 증권․금융면은 거의 다 온갖 지표들로 가득 차 있다. 방송면에는 KBS의 시사프로가 MBC에 비해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 않고 있다는 기사의 근거로 역시 통계가 인용되어 있다(공영방송이 그러면 안되지).
출근했다. 직장 인트라넷에 들어 가니 ‘우리나라 현용주화 크기’에 대한 설문조사에 답변해 달라는 공지사항이 떠 있다. 그 외 업무참고자료로 일일환율동향, 주가 및 원자재가격 동향, 국제금융동향, 각 지역별 화폐수급동향, 각 지역 가계소비지출 변화 분석, 일중 외환시장 동향, 금융시장 동향, 주식시장 동향, 국제 원자재가격 속보가 게시되어 있다. 인터넷 뉴스에 들어갔다. 우리나라 자동차 소비자들은 르노 삼성의 SM5가 말썽이 가장 적은 차로 꼽았단다(제 값 하나 보네. 차 바꿀 때 참고해야지). 수입차 판매 실적이 작년 같은 기간보다 109.7%, 7월에 비해선 14.6% 증가했단다(나도 돈만 있다면, 뭐). 개인의 의식을 조사한 설문도 눈에 띈다. 우리나라 미혼남성의 절반 이상은 결혼 후 자신보다 아내가 수입이 더 많거나 출세를 하면 부담을 느낀단다. 또 '여성이 출세를 위해 출산을 늦추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가?'는 항목에서는 남성들의 경우 '상황에 따라 다르다'(43%)와 '반대한다'(41.8%)는 의견이 비슷하게 나온 반면 여성들은 '그럴 수 있다'(70%)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았단다(역시 화성과 금성이야).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통계인 평균 수명, 평균 소득, 평균 몸무게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보자. 그 수치들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나를 세뇌시킨다. 평균 수명만큼은 살아야 하니까 건강 관리 열심히 해야 하고, 평균 소득만큼은 벌어야 집 식구들에게 체면이 서고, 특히 여성의 경우 평균 몸무게에 맞추기 위해 무리한 다이어트를 감내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가 늘상 접하는 또는 접해야만 하는 수많은 통계는 사람들의 가치판단의, 행동의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통계로 증명되지 않는 것들은 신뢰성이 떨어지고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게 된다.
4. 삶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들이 끼치는 영향에 대하여
어려서부터 영화 포스터를 모으고 배우들의 신상명세를 줄줄이 꿰며 헐리우드 영화의 계보를 외우는 것을 유일한 오락인 두 아이가 있었다. 그들에게 영화는 꿈이요, 희망이요, 신앙이었다. 그들의 최대 목표는 헐리우드에 가는 것이다. 영화와 함께 호흡하고, 고민하고, 방황하며 그들은 나이를 먹어 간다. 후에 한 아이는 시나리오 작가가, 한 아이는 감독이 된다. 작가는 심혈을 기울여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감독은 그 시나리오를 가지고 영화를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그 해 청룡영화제를 휩쓴다. 그런데, 어느 날 감독은 비디오를 보다가 자신이 촬영한 영화와 비슷한 장면을 발견하게 되고, 한반도 전역을 들썩거리게 한 자신의 영화가 역대 헐리우드 영화의 걸작들을 교묘히 짜깁기 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서로를 경쟁자로 생각해 왔던 관계인 터. 감독은 작가가 자신을 매장시키고자 이런 짓을 벌였다고 생각하고 작가를 찾아간다. 그러나 작가는 자기가 표절한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감독은 두 개의 비디오를 이용하여 자신이 연출한 영화와 헐리우드 영화들을 재편집한 것을 동시에 보여준다. 서서히 일그러지는 작가의 얼굴. 그는 말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속았던 거야. 나는 그것이 완전히 내 창작물인줄 알았어!” 작가는 감독을 뒤로한 채 홀린 듯 그 방을 나와 거리를 배회하다 교통사고로 죽는다.
정지영 감독의『헐리우드키드의 생애』란 영화의 줄거리이다. 이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들이 가진 힘을 잘 보여 준다. 우리가 늘 접하는 통계는 또 하나의 ‘헐리우드 영화’가 되어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 우리의 무의식적인 습관, 인생관, 가치관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가장 강력한 삶의 준거로서 작동하게 될 것이다. 나 자신조차도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는.
5. 무엇이 문제인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교는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해 왔다. 과학-가치 중립적인-이라는 통계 역시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않다. 통계기법 자체가 갖는 근본적인 한계 혹은 오류는 논외로 치더라도 통계조사기관이 설문대상범위, 설문내용 등을 교묘하게 조정하여 얼마든지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똑같은 문제에 대해 조사기관(정확히는 의뢰자)이 어디냐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 있음은 이미 많이 보아온 바다. 교회 대신 또 다른 무엇(주로 국가행정기관 혹은 대벌산하의 경제연구소 등)이 통계라는 매개를 통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통제하리라는 염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종교는 자연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때문에 포괄적이다. 종교를 자기 자신의 환경에 맞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되새기기 과정이 필수적이다. 종교적 가르침을 얻고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 해석하는 과정을 거쳐 이를 내재화하게 된다. 통계는 숫자언어를 사용한다. 때문에 너무 명확하다. 그 숫자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다. 결과치로 나온 숫자만 받아들이면 된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나라 여대생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평균 체중이 48kg이라는 통계가 나왔다고 하자. 이제 그것은 하나의 기준이 된다. 나의 체질, 건강, 기타 요건은 모두 무시되고 48kg이라는 숫자만 기억 속에 오롯이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 몸무게를 갖든, 갖지 못하든 그 숫자는 내게 도달하여야 할 하나의 기준 혹은 목표로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과정이 생략된 채 결과만 입력되는 매커니즘 또한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또 하나 문제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통계라는 것은 숫자화하기 위하여 일정한 단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수량화할 수 없는 것까지 수량화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 통계다. 수량화가 불가능한 것은 철저히 무시된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수치화된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게 되고,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며, 하나의 방향성만 갖게 된다. 경제성장율을 예로 들어 보자. 경제성장률은 높을수록 좋은 것이다. 전년보다 높아야 하고, 한 자리수 보다는 두 자리수가 좋은 것이다. 우리는 수십년간 양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해 왔다. 그 결과로 우리 삶의 질이 향상되었는가? 우리는 풍요로워 졌는가? 통계는 말한다. 삶의 질? 엥겔계수가 이만큼 낮아졌다(전체소득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었다)고. 1인당 국민소득이 내년에는 10,000불이 될 것이라고. 엥겔계수로 잡아내지 못하는 삶의 부분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가? 1인당 국민소득 10,000불의 시대에 느껴야만 하는 삶의 곤궁함은 무엇인가? 통계는 이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통계에 의해 조장되는 기준이 ‘평균화’라는 것에 대해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역사가는 말했다. 인간의 역사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그러나 통계가 하나의 삶의 준거로서 기능할 때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이상이 아니라 평균이다. 이상이 아니라 평균을 추구하는 삶, 그 속에서 느끼는 행복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이 장의 비판은 좋습니다)
6. 나가는 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분명한 기준을 갖는 것이다. 푸코는 인간을 관계망 속에 놓여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그 관계망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정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그 관계망은 개인의 노력으로 약간의 틈새는 만들 수는 있을지언정 없앨 수는 없다고 얘기한다. 종교든, 통계든 역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촘촘한 관계망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노력해서 약간의 틈새는 만들 수 있는. 개인이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사회가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는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와 같은 문제일 수 밖에 없지만, 한 개인으로서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한 개인으로서 이 사회에 요구하는 것, 이 사회에서 요구당하는 것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 정말 필요하지 싶다.
ㅇ 통계에 의한 표준화와 전체주의화에 초점을 맞추신 것 참신합니다.
ㅇ 다만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다 보니 주제가 흐트러집니다.
ㅇ 종교 부분은 과감히 생략하고 통계가 우리의 삶을 표준화하고 이에 표준화된 개인이 집단의 가치에 매몰되어 개인으로서 주체성을 상실하고 욕망을 억압당하는 면, 결국 개인의 삶을 전체주의화하는 것을 비평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습니다. 아울러 마르쿠제가 지은 <<이성과 혁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통계는 실증주의의 산물이고, 실증주의는 이미 인정되고 답습된 것을 바탕으로 사고하는 것이기에 기존체제를 긍정하게 된다는 식의 비판을 참고한다면 비판의 예리함이 더욱 번득일 것입니다.
《 참 고 자 료 》
『문화와 철학』중 제2장 문화의 역사, 최한빈, 동녘, 2001
『로빈슨 크루소』, 다니엘 디포/김병익 옮김, 문예출판사, 1993
『헐리우드키드의 생애』, 정지영 감독, 최민수․독고영재 주연
'스친 생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세화님이 말하는 우리시대의 진보 (0) | 2008.07.31 |
---|---|
[단상] ... (0) | 2006.10.03 |
[단상] 2002년 여름, 어느 'gloomy Friday'이었던 듯 (0) | 2006.03.07 |
[기타] 나의 컴에 붙어 있는 글 (0) | 2006.03.07 |
[기타] 고종석을 베끼다 (0) | 2006.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