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기다리며’인가?
‘기다리며’는 어떤 상황하에서도 놓을 수 없는 질긴 끈같은 ‘삶’이지 싶다. 포조의 말처럼 사람들은 무덤에 걸터앉은 채 태어나는 것. 빛이 잠깐 비추이는 동안에 어딘가로 달려 보기도, 지저분한 진흙탕을 기어 보기도, 위안을 갈구하는 몸짓을 나눠 보기도, 그물 속에 갇힌 절망에 빠져 보기도, 남을 위한 일을 해 보기도, 뼈다귀 하나를 얻기 위한 눈물겨운 애원도, 싸우고 헤어지고 화해도 하는…. 극중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곤’이 고도를 기다리며 하는 혹은 했다고 하는, 그러해야 한다고 말하는 모든 것들이 결국은 우리네의 범상한 ‘삶’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기다림’ 끝에 오는 것이 비록 죽음뿐이라 해도, 그래도 우리는 ‘…기다리며’ 무언가를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들일 수 밖에 없나 보다.
2.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곤’중 누가 더 좋은지?
‘블라디미르’의 처절함이 맘에 와 닿는다. ‘블라디미르’는 말한다. <그 생각을 달리해야 하겠는데. 일생동안 그 생각을 멀리하려 했지,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야, ‘블라디미르, 침착하자, 결코 다한 것은 아니쟎아.’ 그리고는 그 고생을 다시 했지.> 어제도, 오늘도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도,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이 없는 시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모자-정신의 메타포가 아닐까?-를 만지작거릴 수 밖에 없는 것도, 장님이 된 포조의 도와 달라는 애원에 그처럼 격렬하게 인류애를 부르짖는 것도 그 처절함 탓이려니….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는 ‘에스트라곤’을 추스리며 같이 외로움과 위안과 희망과 좌절을 공유하며, 기다림의 끈을 놓지 않는 ‘블라디미르’의 모습은 점점 파편화, 개별화되어 가고 있는 오늘 날의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습이 아닐까?
3. ‘고도’란 무엇인가?
‘고도’란 이 부조리하고 희망없고 고통뿐인 세상을 뜰 수 있게 해 줄 ‘죽음’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사람은 결국 누구나 다 죽음을 목표로 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후의 세계를 온갖 희망을 담아 그렇듯 정성스레 꾸며놓지 않았을까? 극중의 ‘블라디미르’도 ‘에스트라곤’도 모두 삶에 지친 사람들이다. 살아낸 햇수를 불문하고 삶에 지친 사람들이 최후의 희망으로 삼을 수 밖에 없는 건, 오직 하나 ‘죽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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