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비바람 탓에 아직도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볍게 다녀온다고 시니어파티를 따로 만들었음에도, 아니 그 가벼움 탓에 오히려 더 3000미터급 산의 기후 변화에 더 허둥대었던 듯 합니다. 오쿠 호다카다케의 매서운 비바람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텐트를 날려버린, 홍대 산악부 전대미문의 에피소드를 만들어낸 무로도의 바람과 함께요.
줄일 수 있는 것은 모두 줄인, 그럼에도 무겁기만 한 배낭을 메고 산행을 시작합니다. 요꼬산장까지의 2시간여의 산행은 우아함의 극치였습니다. 깔끔하게 잘 정리된, 그러면서도 자연미를 최대한 살린 일본 국립공원 유원지에 대한 찬사를 날리며, 왜 이렇게 속도가 빠르냐는 농도 나누며 유유자적합니다. 중무장한 일본 등산객들을 보며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그들의 오버로 해석 했습니다.
요꼬산장이후 이어지는 오쿠 호다카다케까지의 돌길은 ‘지루’ 그 자체입니다. 어찌 그리 한결같은지... 이 지루한 길을 ‘게으른 산행’을 찬양하며 그 다음 날까지 오릅니다. 속도가 빨랐으면 덜 지루했을 려나요? ‘게으른 산행’의 저자는 천천히 산행을 하며, 산에 있는 풀도 나무도 보라고, 그게 정말 산을 즐기는 거라고 주장하지만, 이 곳에서 볼 것이라고는 바위밖에 없습니다. 지저분한 만년설하구요.
오쿠 호다카다케 산장에 둥지를 튼 후, 한 바퀴 둘러보니 산장 뒷 터의 바람이 장난이 아닙니다. 그때만 해도 몰랐습니다. 이 바람이 내일의 전초전이라는 것을... 북주고악까지 다녀올까 하는 생각도 있는 터라, 배낭 덜어내고 옆 봉우리(이름이 뭔가요?)를 일단 오릅니다. 우와, 그 경관이란... 올라오면서 우리가 되뇌였던 멋대가리 없는 산이라는 말은 쑥 들어갑니다. 3000미터급 연봉이 갖는 스케일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이 뿜어내는 날카로움이 위풍당당합니다. 저 멀리 우리 주력부대가 어제 통과했을 야리가다께도 보였습니다. 약간의 변주야 말로 최대의 예술작품인가 봅니다. 자신에게까지 이어진 통일성을 깨뜨리며 약간 오른쪽으로 날카롭게 뻗친 야리가다께의 모양새는 압권입니다.
풍경 감상 후 가야 할 북주고악까지의 길을 가늠해 봅니다. 몇 개의 까마득한 봉우리를 오르락내리락 해야 합니다. 그것도 급경사의 암릉길입니다. 트래바스란 말은 이 산에서는 아예 존재하지가 않습니다. 저 길에 족적 남기고픈 미련이야 있지만, 과감히 포기합니다. 꼭 디비뎌야만 맛이냐, 보는 것도 맛이다 하면서요. 어스름해진 후에 완전히 퍼져 도착한 주력부대를 맞으며, 아까의 결정이 옳았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남아있는 이 찝찝함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좋던 날씨가 다음 날 새벽부터 비바람으로 바뀝니다. 춥긴 했지만, 오쿠 호다카다케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그래도 여유가 있습니다. 오르는 길은 비바람이 불어도 의지가지할 게 있쟎아요? 정상까지 가볍게(?) 올라 증명사진도 박고, 정상주도 한 모금 합니다.(그것도 우아하게. 꼬냑잔으로 정상주 마셔본 분 계신가요? 여기까지 들고 오신 진만형께 감사를...)
이제 내리막길입니다. 때맞춰 비바람도 더 쎄지기 시작합니다. 얘는 전생에 권투선수였나 봅니다. 슬슬 몸 풀듯이 때려대다가 어느 한 순간 혼신의 힘을 다해 냅따 갈겨 댑니다. 그러면 우리는 글로기 상태에 빠집니다. 몸은 저 만치 날라가고, 눈앞은 깜깜해 지고, 얼굴은 얼얼해 집니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좌우를 둘러보면 깎아지른 낭떠러지길입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그냥 갈 수밖에 없습니다. 수시로 바람에 날리며, 우박성 비에 난타당하며, 설악산 화채 릿지 정도의 난이도를 가진 길을 묵묵히 내려갑니다. 그 끝에 가미코지 야영장에 차린 둥지는 천국이었습니다.
다음 날. 재학생과 이별하고 버스에 몸을 실습니다. 날씨가 계속 안 좋을 것 같은 데, 무리하게 계획을 잡아놓은 재학생들이 걱정되긴 합니다만, 도와줄 것은 짐 덜어주는 일밖에 없습니다. 재학생들 후반기에 쓸 짐 등을 몽땅 짊어 메니 허리가 휩니다. 이 짐 들고 버스, 기차, 버스, 트롤리버스, 도보, 케이블카, 로프웨이, 트롤리버스를 갈아타며 무로도에 도착합니다. 일본사람들이 평생에 한 번은 꼭 가고 싶어 한다는 알펜루트입니다만, 다양한 탈 것들을 이용하여 이동하는 등등의 낭만적인 광고 문구는 교통수단 갈아탈 때마다 그 많은 짐들을 오르락 내리락 해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산행만큼이나 힘들더군요. 예전에 베이스캠프조 하며 베이스짐 나르던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 제가 맨 40리터짜리 배낭에는 김치가 잔뜩 들어 있었답니다. 터미널에 재학생 짐 등을 맡기고 야영장에 도착했습니다. 야영장 바로 옆이 지옥곡이라 유황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바로 옆에 온천도 있습니다. 있다가 온천 할 요량으로 얼마냐? 몇 시까지 하냐? 등등을 확인했습니다만, 텐트 치고, 저녁 먹고 나니 아무 생각이 안나더군요. 그냥 잤습니다.
아침 일찍이 일어납니다. 쓰루기다께팀과 오야마팀의 두 파티로 나누기로 합니다. 야영장에서 바로 쓰루기다께로 이어지는 길이 있습니다. 쓰루기다께팀은 왕복 10시간 정도를 예상하며, 가볍게 출발했습니다. 오야마팀은 다시 한 번 게으른 산행을 합니다. 날씨가 아주 쾌청합니다. 어제 이맘때 겪은 비바람은 이제 아득하기만 합니다. 길은 여전히 바위길입니다만, 이 곳 분위기는 가미코지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가미코지에서 만난 등산객들은 모두 오버트라우저에 등산화, 스패츠로 중무장한 반면에 여기는 거의 운동화 차림입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오야마 혹은 오난지야마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 갑니다. 오야마에 올랐더니 저 멀리 야리가다께도 보입니다. 오야마에는 일본사람들이 신성시한다는 신사가 있는 데, 그 신사에 소원을 적은 쪽지를 매다나 봅니다. 하나 매달까 하다가 일본신들이 한글을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아 포기합니다. 500엔이 아깝기도 하구요.
대려산을 지나니 진사악에서 별산까지 이르는 능선이 한 눈에 쫙 펼쳐집니다. 떠오르는 단어, 황량함. 아무 것도 없습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좌우 협곡에 아직 녹지 않은 만년설이 있고, 구름 그림자만 둥둥 떠다닙니다. 이 황량함 사이로 오직 길 하나만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가 갈 길입니다. 지금 딛고 있는 길은 바위길이지만, 저 멀리 펼쳐져 있는 길은 평탄해 보입니다(진만형께서 올리신 사진중 <대여산에서 진사악가는 길> 참조). 저 멀리 대학 산악부로 보이는 팀이 운행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무거운 짐 지고, 완만한 오르막길을 천천히 가고 있습니다. 평탄해 보이는 저 길에 가면 좀 편안해질까 싶어 걸음을 빨리 합니다. 막상 도착한 그 길은 이제껏 디디고 있던 길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마치 인생 같지 않습니까?). 바람이 다시 세차지기 시작합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태풍이 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진사악 트래바스길에서 그냥 내려가기로 합니다. 야영장은 아까부터 계속 시야에 있던 참입니다. 내려가는 길은 역시 지루합니다. 눈 아래 뻔히 보이는 데도, 시간이 제법 걸립니다. 시간 반은 걸린 것 같습니다.
어영부영하고 있으니 쓰루기다께팀이 도착합니다. 예상보다 많이 늦었길래 그 이유를 물었더니 오야마까지 갔다 왔답니다. 얼굴들이 하얗게 질려있는 것을 보니 무지 고생했나 봅니다. 이제 산행은 끝났습니다. 산행의, 더구나 일본에서의, 마무리는 온천이 제격입니다. 서둘러 온천으로 갑니다. 혼자 집 지키는 데, 바람이 제법 셉니다. 아무래도 불안해서 폴대를 만지작 거리는 데, 돌풍이 들이 닥치더니 텐트를 엎어치기 해 버립니다. 저기 매트리스가 날라 갑니다. 이런저런 계획들을 적어놓은 메모지들도 바람에 흩날리고 있습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허둥대고 있는 데, 주변 텐트의 일본인들이 몰려듭니다. 멀찌감치 날아가 버린 것들은 포기하고, 근처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 담습니다. 찌게거리 준비해 놓은 코펠이 엎어져 버렸습니다. 부서져 버린 텐트에서 음식 찌꺼기 묻어있는 짐들을 꺼내자니 옹색함 들켜버린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한편으론 꺼내면서 한편으론 감추느라 손이 절로 분주해 집니다. 온천 갔던 우리 팀이 뛰어 옵니다. 막 나오는 데 뭐가 날라 가더니, 텐트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더랍니다. 터미널 락카에 보관해 놓은 텐트를 찾아오기로 했습니다. 기헌형이 총대를 맸습니다. 엎어져 버린 텐트에서 쓸어낸 짐을 한 쪽에 쌓아놓고, 그 짐을 바람막이 삼아 저녁을 합니다. 모래바람이 한 번 들이닥칠 때마다 얼굴이 얼얼합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에 다시 텐트를 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텐트를 다 친 후에 비가 오기 시작합니다. 야영장관리소에서 보니 우리나라 서남부에 상륙하려던 태풍이 갑자기 이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합니다. 옆 텐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모래바람에, 비바람에 텐트는 온갖 고성을 질러 대고, 폴대는 너울너울 춤을 춥니다. 5명이 꽉꽉 들이차 있으니 더 이상 날라 가지는 않겠지만, 이 비바람에 텐트가 무너져 내리지나 않을 런지 높아지는 비바람소리에 따라 걱정도 깊어집니다. 슬금슬금 밀고 들어온 비에 침낭이 반은 젖었나 봅니다. 랜턴을 켜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두시 반.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 와중에도 열심히 잠을 자고 있는 동료들을 깨웁니다. 버너를 피웁니다. 여전히 비바람이 거세긴 하지만, 어제 밤보다는 많이 잠잠합니다. 오늘 하루는 시내관광을 하고, 내일은 서울로 갑니다. 텐트 안에 옹기종기 있다가 짐을 챙기기 시작합니다. 무로도 터미널 가는 한 시간 남짓한 길은 왜 그리 먼지... 지옥곡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황냄새는 왜 그리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지...
어제 산장에서 주무신 광만·진만 두 분 선배님을 무로도 터미널에서 만났습니다. 바로 가나자와로 가기로 합니다. 경관이 아름답다는 무로도에서 비조다이라까지의 길은 꾸벅꾸벅 조느라 다 놓쳐 버렸습니다(깨어 있었다 해도 구름이 잔뜩 끼어서 제대로 볼 수도 없긴 했을 겁니다만). 다테야마에 도착하니 별천지입니다. 태풍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전혀요. 그동안 몸 꽁꽁 감쌌던 쟈켓 다 벗어서 배낭에 꼭꼭 집어넣습니다. 다시 여름입니다.
가나자와에 도착했습니다. 그동안 고생한 자신들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계획했던 것보다 레벨이 높은 호텔을 잡습니다. 호텔 뒷마당에서는 텐트를 말리고, 저마다의 방에서는 침낭이며 옷가지를 말립니다. 시내에 나서긴 했습니다만, 비바람에, 태풍에, 암릉길에 지친 몸과 마음으로는 도저히 관광을 즐길 여력이 없습니다. 그래도 먹는 것은 가능하더군요. 저녁은 다베 혼다이라는 일본내 고기부페집에 가서 양껏 먹었습니다(질도 괜찮았습니다). 밤늦게까지 일본의 유흥가를 쏘다닙니다. 그간의 일이 벌써 아득해 집니다. 일본에 몇 달은 머문 것 같습니다.
일주일 이상이 지난 지금이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긴 하지만, 간만에 육체적으로 한계선상까지 밀쳐졌던 경험이 아주 좋았었습니다. 가기 전에, 힘든 순간순간을 즐기겠다 라는 모진 다짐을 하고 갔는데, 잘 안되었습니다. 즐기지는 못했지만, ‘아무리 힘든 순간도 결국은 지나가게 간다’라는 것을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지나갈 뿐 아니라 더 좋은 추억으로 자리매김 된다는 것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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