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희씨의 '33세의 팡세'를 읽고 있는 중(2003년 여름 현재^^)이다. 밑줄 그은 구절들.
"사람이 33세 이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상이라는 검고 어두운 터널을 뚫고 다녀오지 않으면 안 된다."
"여자는 대개 아이를 두엇 낳으면 영혼의 날개를 찢어 버리고 무섭도록 자진해서 동물적으로 땅에 속하게 된다"
"우리는 행복이 모자라서 불행한 것은 아니다. 다이너마이트와도 같이 아름답고 눈부신 삶의 열정들의 편린에 대한 기나긴 기다림. 그런 찬란한 전설의 부재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강렬하게 집중된 삶을 사는 것"
"용기를 내게. 상처는 대단치 않네." 로미오가 말했다. 마큐시오는 비애를 담은 채 미소했다. "그렇지. 그것은 샘처럼 깊지도 않고 교회문처럼 넓지도 않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네."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해 그는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중에서-
권태-영혼의 나병이라 불리는 권태란 바로 그런 기적을 살아 보았던 행운에 대한 기나긴 보상인지도 모른다.
매일매일 똑같이 그것을 들어야 한다는 데에 대한 역겨움, 또한 그것을 듣지 않는다 해도 달리 신통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데 대한 뜨거운 노여움
인간은 자기가 실패한 어떤 것에 대한 동경을 스스로에게까지 감추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도 실패의 기미가 있으면 일부러 먼 길을 돌아 그 사람을 피해 달아나면서 바로 본다. 그러면서도 그 바라봄 자체를 자신에게조차 숨기려 한다. 그러나 그렇게 바라보는 방법만이 사랑 자체를 위하는 가장 좋은 길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언제나 삶을 싫어했다기보다는 삶의 지리멸렬성, 진부함, 김빠진 맛, 미적지근한 온도, 밑도 끝도 없는 허황된 공허를 혐오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인간이 된다는 것만큼 장렬한 일은 없다. 차라리 천사나 악마가 된다는 것이 훨씬 더 쉬우리라. 인간이란 천사나 짐승 사이에 걸쳐진 하나의 밧줄. 그 모든 옥타브에 모조리 충실을 바칠 때 비로소 하나의 인간이 된다. 그것만큼 장렬하고 그것만큼 힘들고 그것만큼 강인하게 버텨야 하는 것이 또 있을까
우리는 시간을 과거.현재.미래의 세 시제로 나눈다. 과거는 너의 순간이다. 미래도 너의 순간이다. 그러나 현재는 신의 순간이다. 현재는 영원의 일부인 것이다. 신은 단지 하나의 시제를 가지고 있다. 신에게는 오직 하나의 시제, 즉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현재에 불행한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이 순간은 언제나 순수한 축복이며 신의 순간이다. 과거의 시체앞에서 울지 말라. 네가 아무리 불행한 과거의 기억을 가졌더라도, 네가 신의 순간 속에 있을 때면, 그대 역시 행복하고 축복되다! -라즈니시-
“가능한 한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도록 노력하라”로 시작되는 모든 인생 지혜를 나는 힘껏 증요한다. 그리고 나는 말한다. “가능한 한 자기 자신을 주관적으로 보도록 애쓰라.” 절대적으로 주관적으로!
모든 밤은 밤인 것 같으나 모든 사람에게 제각기 다른 밤이었고, 모든 삶은 같은 삶인 것 같으나 모두 제각기 다른 생존의 무게를 짐지고 지구의 자전처럼 변함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모든 짐은 무거웠고 모든 뼈는 자기의 집을 지기에 너무나 허약한 듯했다. 삶이란 무엇일까?
인생은 악이다. 고통과 궁핍이 그치자마자 홀연 권태가 찾아와서 권태 또한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시계추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를 좌우로 왔다 갔다 한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간은 자유고 자유 그 자체이지만 단 결단의 용기를 지니지 못한다면 자유란 무에 불과할 뿐이 아니겠는가? 공포가 아니겠는가?
‘잠적’이란 말처럼 좋은 말이 또 있을까? 죽은 것처럼 엎드려 밥도 안 먹고 커피만 마시고 음악만 듣고 책만 읽고 시름시름 아프다가 잠 드는 것. 잠적. 대학 합격 이후의 나의 자유는 온통 그 잠적에 헌정되었다. 바퀴벌레나 빈대처럼 어둠 속에서 구물거리는 것. 그리고 게으르게 배로 기는 것. 긴장을 풀고 하염없이 시간 속에 녹아드는 것. 물통 속에 빠진 휴지처럼 그리하여 시간 속에 거품도 없이 저항도 없이 풀려드는 것. 의욕을 상실하는 것.
사랑이라는 것 속에는 약간의 광기가 있지만 광기 속에는 또 약간의 이성이 있기도 하다. 쇠가 자석에게 한 말이 있다. “내가 너를 가장 미워하는 것은 네게 나를 끌어당기면서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게 끌어들이지는 않기 때문이다”라고. -프리드리히 니체-
“여기는 어느 곳이며, 이는 어떤 방향이며, 이는 세계의 어느 땅인가?”
“사랑이란두 사람 사이의 공동체험이다. 그러나 사랑이 공동체험이라는 사실은 당사자 두 사람이 서로 비슷한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다. 사랑받는 사람은 지금까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온 사랑에 대한 하나의 자극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모두는 이러한 사랑을 다소 알고 있다.
“어떤 사랑의 가치나 질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 자신에 의해서만 결정될 뿐이다. 우리들 대부분이 사랑받기보다는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그리고 사랑받는 상태가 많은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상태라는 사실은 명백한 진리이다. 사랑받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을 끊임없이 발가벗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그 경험이 자신에게 고통만을 안겨준다 할지라도 가능한 한 사랑받는 사람과 어떤 관계라도 맺으려고 열망한다.”
욕망이라든가 갈애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애착의 마음, 집착의 마음, 잡히는 마음이 불의 근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결국 문제는 번뇌의 불꽃을 끄는 것만이 이상이며 ‘니르바나(Nirvana)’란 말 자체가 ‘번뇌의 불꽃을 끄다’라는 말인 것이다.
“그냥 둬요. 운명이란 운명인 것이니”
우리와 같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며 산다는 것을 견딘다는 것이 문제이며, 운명의 어둠을 벗어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루하루 운명의 어둠을 어떻게 지키느냐 하는 것이 끊임없이 문제가 될 뿐이랍니다.
“살도록, 과오를 범하도록, 타락하도록, 승리하도록, 인생에서 인생을 다시 창조하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은 몸을 녹이기 위해 모여 앉은 고슴도치와 같은 것으로 너무 가까이 모여 있으면 마음이 빽빽하여 쑤시고 그렇다고 너무 떨어져 있으면 춥고 비참하다. 어찌 해도 인간이란 불행하게 돼먹은 존재인 것이다.....
아니라오. 나에게 하나의 꿈이 있었다오. 현실이 너무 피곤할 때 나는 백년공주처럼 아름다운 잠에 빠지기를 원한다오. 공주가 열 여섯 살이 되는 생일날 다락방에 있는 물레 바늘에 손가락을 찔려 잠들게 된다는 동화에서처럼, 왕궁도 잠들고 왕궁 안의 모든 사람도 잠들고, 마구간의 말들까지도 잠들기를 원한다오. 그리하여 궁성으로 오는 길은 잡초로 휘덮이고 장미나무 가시와 찔레나무 가시로 온통 소로길은 덮여 아무도 오지 않고 요람 속에 은하수로 뇌를 씻고 꽃향기를 링거액 삼아 아름답게 소생하고 싶은 것 - 그런 망각의 간호를 받고 싶은 것. 향수 같은 망각, 의식불명의 화평함, 나는 그런 잠의 간호를 받고 싶다오. 나는 섬처럼 사면의 잠으로 둘러싸여 출렁이고 싶다오. 그리하여 어느 날 부화하는 새처럼 아름답게 날아오르고 싶다오. 신성한 뼈를 태양수에 축이며 그렇게 새롭게 갱생하고 싶다오. 마치 시효가 지난 카드를 관공서에 가서 갱신하고 다시 새로운 시효의 카드를 발급받아 오듯이, 그렇게 잠의 간호사에게서 목숨의 알을 알몸으로 씻겨서 향유를 발라 따끈따끈하게 구워지고 싶다오. 순결하게 하얀, 방금 구워낸 빵처럼, 말랑말랑하게 따끈한 목숨의 처녀성을 나는 잠의 강 - 레테 강가에서 언제나 정숙하게 건져오고 싶곤 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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