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비디오로 봐야지 싶어 미뤄놨던 영환데, 쎄미나 취소되어 생긴 여백 채울 요량으로 극장으로 향했다. 상영이 거의 끝나가는 영화라 좌석이 썰렁했는데, 극장문화라는 게 있긴 있나 보다. 씨네큐브 분위기가 좀 진지하다면, 스타식스 정동은 그야말로 오락을 즐기는 분위기라고 할까? 영화 보는 내내 거슬렸다, 같이 보는 사람들이.
어쨌든, 그렇게 봤다, ‘오버 더 레인보우’를. 정말 끊임없이 비가 내리더라. 영화 끝나고 밖에 나왔을 때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정작 무지개는 창가로 햇살 찬란하게 비치는 날, 창가에 놓아둔 투명한 유리컵 옆에 앙증맞게 생기더라만. 많은 사람들에게 부담 없이 정서적으로 산뜻하게 와 닿을 거라는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영화가 창작활동의 하나여야 한다고 믿는 내게는 무지 많은 패러디-영화를 많이 접하지 않은 내게도-가 거슬렸다. 그럼에도 그 앙증맞은 무지개만 패러디가 아니라면, 모두 다 용서해 주기로 했다. 패러디 아닌 것 맞지?
소재가 기억이라는 점이 아주 맘에 들었다. 예전에 기억을 소재로 한 ‘뷰티플 라이프’를 아주 재미있게 보았었거든. 기억상실이란 정신적인 공간과 지하철 분실물 보관소라는 물리적 공간의 배치가 아주 돋보였다. 지하철 분실물 보관소에 쌓여 있는, 찾아가지 않는 그 물건들은 그 주인들이 애써 잊고싶어 하는 기억들이 아닐까? 사람들은 모두 꼭 잡고 싶은 기억과 잊고 싶은 기억을 갖고 살쟎니? 살면서 마음 한 켠에 먼지 켜켜이 쌓이도록 내버려 둔 것들, 연희가 그러듯이 먼지털이개로 그 먼지 털어 내어 날 것의 아픔 새삼스럽게 들춰내는 게 좋은 걸까? 연희 친구처럼 그냥 먼지 쌓이게 내 버려 두는 것이 세련된 게 아닐까?
분실물 보관소에서의 또 다른 에피소드. 보관중인 물건에 대해 연희는 ‘남의 것 왜 뒤지냐’고 하고, 연희친구는 ‘재미있쟎아’ 하면서 계속 그 물건들 뒤져보지. 그게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람직한 것은 물론 연희의 태도겠지, 적당히 거리 두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런데 인생이란 게 항상 촌스럽다 보니, 연희친구처럼 마구마구 헤집고 들어가려고 하지. 뒷감당도 못하면서. 중반 이후 연희가 먼지털이개로 그 물건들의 먼지 털어내는 것은 연희가 기꺼이 촌스런 관계로 들어간다는 의미일 터.
90년대 학번의 밝은 수채화 같은 모습이 보기 좋았다. 80년대 학번은 좀 무거웠거든. 무거움에서 밝음으로의 전환을 역사의 진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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