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감각을 이용하여 즐기다

[미술] 간송미술관에 다녀오다

sunny 존재 자체가 복음 2004. 9. 6. 15:17
 

어제 간송미술관에 다녀왔다.

비록 많이 다닌 것은 아니지만, 여지껏 다녀본 전시회중 가장 감동적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간송’이라는 사람에 대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하듯이 국보급 문화재를 사 모았다는 데,

그 재력과 감식안에 감탄했고,

소장품들에 둘러싸여 무지 행복했을 그 인생이 무지 부러웠다.


유명세에 비해 전시실은 무지 좁더라. 그나마 2개밖에 없고.

그 좁은 전시실에 빼곡이 들어찬 그림들이 뿜어내는 무언가에

완전히 압도당해 밖에 나와 숨 고르는 데 한참 걸렸다.


어떤 그림 마주하고 선 순간, 저 그림이 무어구나라는 생각을 할 사이도 없이

그냥 숨이 멎는 경험 해 본적 있니? 혜원의 미인도 앞에서 그런 경험 해봤다.

그 그림의 어떤 힘이 무덤덤한 나에게서 그렇게 강렬한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는지는 지금부터 풀어나가야 할 수수께끼지만, 그림의 유명세 탓은 아닌 것 같다.

그냥 ‘어?’한 다음에 ‘아, 미인도구나’했거든.


예전에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람은 연담이었는 데, 어제 전시회에서는, 그다지대.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사람은 겸재 정선이었구,

정서적으로 가장 와닿은 사람은 현재 심사정이었다.

화폭밖까지 뻗칠 듯한 겸재의 힘에 반했다. 특히 청풍계에서.


쓸쓸함과 스산함으로 가슴에 와닿는 그림이 있었다.

‘누구 그림이지?’싶어 확인해 본 작가는 현재더라.

‘음, 그렇구나’ 고개 끄덕였다.

조부가 역적모의에 연루된 탓에 철저히 소외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사람, 현재. 그가 그린 그림다웠다.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한 아우라란 개념이 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진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 미술품에는 정말 아우라가 있더라. 거금 2만냥 투자해서 사 온 도록으로는 그 감동 재현되지 않더라.


그동안 마그리뜨의 ‘정상에서 부르는 소리’를 바탕화면에 깔아놓고 위안거리로 삼았었는 데, 현재 그림으로 바꿀까 생각중이다. 정서적 좌표가 똑같은 사람을 발견한 반가움을 표하기 위해.


순전히 여담인 데, 겸재가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떵떵거리고 살았을 거다 싶었다. 겸재 산수화의 무대가 압구정, 송파, 광나루더라. 겸재에게 부동산을 보는 안목이 있는 것 같지 않니?


흔히 겸재를 진경산수화의 원조라고 하지.

어제 집에 가서 관련 서적 좀 뒤져봤다. 겸재가 주로 교류한 사람들이 ‘배청숭명가’들이더라. 그 시대에, 겸재같은 사람이 진경산수화를 시작할 수 밖에 없었겠구나 싶었다. (노파심에서 부연설명하자면, 그 전까지는 남종문인화라고 명나라의 그림을 모방하였는 데, 명이 망하고 오랑캐인 청이 그 뒤를 잇게 되자 모방하고 숭배할 대상을 잃은 우리나라의 화가들이 진경산수화로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을 거라는 해석을 해봤다. 뭐, 자신은 없지만, 그다지 틀린 해석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여담.

‘도원나루’란 그림이 있더라. 제목이 아주 인상적이지 않니?

나루란 들고 나는 데쟎니? 그 그림에서의 나루는 나는 분위기였던 거로 기억된다

-물론 내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피안의 그 곳인 도원에 위치한 나루는 어디를 향한 걸까? 차안의 이 곳?